백두대간 사람들 34 속리산- 열두폭 치마를 벗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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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197,124회 작성일 18-06-07 15:17본문
열두폭 초록 치마를 벗기지 말라
호우경보가 내린 날 여인을 만났다. 초록빛 열두폭 치마를 넓게 펼치고 익어가는 들 위에 좌정한 속리산은 옛 사람들의 맑은 눈을 빌리지 않더라도 ‘치마를 맵시있게 잘 차려 입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무섭게 내리는 빗줄기도 속리산 치마폭에 안기면 물레에서 뽑아져 나오는 명주실이 되어 골을 흐르고 계곡을 채운다. 내린 비로 오랜만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산 아래로 내달리는 계곡은 비단필을 풀어 놓은 것처럼 하얗게 빛이 났다. 그 명주필이 산을 내려서면 낙동강이 되고 한강이 되고 금강이 된다.
속리산은 마땅히 생명의 땅이어야 했다. 그러나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멀리한다’(山不離俗 俗離山)는 최치원의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게 속리산은 이미 오래 전에 세속의 복판으로 끌려 나왔다. 속리산을 세속으로 끌어낸 것은 전설의 가닥을 더듬고 역사의 여백을 뒤지면 조선 3대 왕인 태종에 가 닿는다.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자신의 형제까지 도륙한 끝에 용상에 앉은 이방원은 자신의 죄를 씻겠다고 법주사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속리산의 들머리인 지금의 말티고개가 열린 것은 이때라고 한다. 태종은 법주사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칼에 목이 떨어진 영혼들을 위로하는 천도불사를 올린 뒤에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고 한다. 지금의 보은이 보령이라는 옛 이름을 버리게 된 것도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각오로 태종이 내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린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의 본을 따듯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도 속리산을 찾는다. 이때 말티고개는 세조의 행차를 위해 전석으로 포장까지 하는 호사를 누렸다. 지금도 굽이가 심하고 경사가 심한데 아무리 잘 다듬었다고 해도 고개는 험해서 세조의 가마를 멘 가마꾼들이 고개 중간에서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세조는 말을 타고 고개를 넘을 수밖에 없었다. 세조가 말을 타고 넘은 고개라 해서 말티라고 부른다는 것이 고개의 내력이었다.
세조가 병든 몸을 사리지 않고 속리산을 찾은 연유는 단지 치료를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속리산에 전하는 전설 가운데 유독 세조와 관련된 전설이 많은데 전설 속의 세조는 자연까지 복종케 하는 절대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마가 걸린다”는 왕의 말 한마디에 소나무가 가지를 쳐들고, 발목을 잡는 칡넝쿨을 “고얀 놈”이라는 한마디로 나무를 타고 오르게 만들었다는 세조의 이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조카를 죽인 패륜을 하늘의 힘을 빌려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때의 이적으로 정이품이라는 벼슬을 얻은 소나무는 지금은 한쪽 팔을 잃은 불구의 모습으로 서 있다. 혹독한 솔잎흑파리의 공격도 이겨냈지만 93년 태풍이 기어코 한쪽 가지를 부러뜨려놓은 탓이다.
정이품송에는 세조의 이야기뿐 아니라 세조에게 왕위찬탈의 부당함을 직언했다가 쫓겨난 딸 이야기도 전한다. 딸은 쫓겨난 뒤 민간에 숨어 살다가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신랑이 세조의 정적이었던 김종서의 둘째 손자였다고 한다. 둘은 속리산 인근에서 아들 딸을 한명씩 낳고 숨어 살다가 그만 세조의 속리산 행차 때 발각되게 된다. 이때 이들을 잡기 위해 군사들이 진을 친 곳이 지금의 정이품송이 서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진터라는 이름도 군사들이 진을 친 곳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속리산 제1경인 문장대(文藏臺)에 남겨진 세조의 전설은 속리산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아이러니다. 세조가 법주사 언저리에서 요양하며 목욕소라는 지명을 낳고 복천암이라는 암자를 지으며 ‘열섬의 환약과 열두동이의 탕약’으로도 낳지 않는 괴질을 달래고 있을 때 꿈 속에서 월광태자라는 귀인을 만나게 된다. 귀인이 알려주는 대로 오른 곳이 문장대이고 거기에 오르니 삼강오륜을 설파한 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조는 감읍해 기도를 올리고 신하들과 그 책의 내용을 강론했다고 한다.
월광태자라는 귀인이 삼강오륜을 세조에게 전한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조카를 죽인 악인에게 삼강오륜을 가르칠 자격을 주려 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조보다 100년 쯤 뒤 문장대에 올랐던 시인 임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행동을 했을까? 문장대는 관리들과 술타령을 벌인 보은 현감을 혼내준 임제의 이야기로 답답하기만 한 가슴을 위로해준다. 임제는 가짜수염까지 달아 신선으로 위장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 보은 현감을 실컷 나무란 뒤 신선주와 환약을 먹이는 아량까지 베푼다. 물론 신선주는 말오줌이었고 환약은 토끼똥이었다. 만약 임제가 세조와 같은 대의 사람이었다면 호랑이쯤으로 변신해 삼강오륜을 말하는 뻔뻔함을 물어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조에 얽힌 설화는 500년이 넘는 세월의 강을 끈질기게 흘러 새로운 우환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문장대 아래 바위틈에는 감로수라는 샘이 있다. 바위를 뚫고 솟는 석간수가 아니라 문장대 바위에 맺혔던 빗물이 바위벽을 타고 흘러내려 고인 물에 지나지 않는 샘이지만 묘한 위치 때문에 감로수로 불리는 샘이다. 세조가 이 샘물의 효험으로 괴질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통에 지금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출입금지’ 팻말을 넘는 외줄타기의 피해는 한 사람에 그치는 것으로 눈감을 수도 있겠지만, 문장대에서 바라보이는 상주 땅 용화온천지구의 파헤쳐진 초록은 콩 한쪽도 나눠 먹는 시골인심을 작살내고 한강의 수질까지 위협하고 있다.
세종실록에도 등장하는 용화온천은 상주에서는 세조의 괴질을 고친 명수로 불리지만 괴산에서는 불소덩어리의 맹물로 폄하된다. 온천이 개발되면 하류지역인 괴산은 환경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용화온천 개발계획은 국립공원구역 지역과 국립공원구역 외 지역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지만 두 지구 모두 개발이 중단된 채로 버려져 있다. 몸싸움으로 시작된 분쟁은 충북과 경북의 지역대립 구도로 발전하면서 법정공방으로 이어졌다. 용화지구와 문장대지구로 갈라져 진행된 재판은 공원구역 내에 있는 용화온천은 괴산쪽이 고법까지 승소했고, 공원 밖인 문장대 온천은 상주쪽이 고법까지 이겨 공사를 재개하게 됐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같은 온천지구이면서도 결과가 이렇게 다른 것은 두 구역이 선택한 정화처리시설이 다르고 국립공원 구역과 바깥으로 나뉜 탓에 적용법규가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소문은 별의별 흉흉한 억측을 만들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내걸린 현수막에 적힌 ‘상주의 자존심’ 따위의 글귀는 갈라진 인심을 봉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정부기관들의 이름도 버젓이 적혀 있었다. 지역감정을 부추기기는 괴산쪽도 마찬가지였다.
운흥리에서 멀지 않은 화양구곡의 화양동은 송이철을 맞아 동리가 온통 떠들썩하다. 마을이 공동으로 송이채취권을 입찰받고 온 마을사람들이 함께 송이를 따고 그 수익금도 공동으로 나눈다고 했다. “집집마다 한명씩 다 참여해요. 노인들은 힘이 없으니까, 혹시 있을지 모를 송이도둑을 지키는 일을 하기도 하고 품질별로 급수를 나누는 등 가벼운 일을 해요.” 젊은 사람들에게는 손해일 텐데도 공동수확 공동분배를 반대하는 이들은 없다고 한다. 호우경보에도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이들에게 산을 지키던 노인들이 따뜻한 봉지커피 한잔을 건넨다. 이런 모습이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다.
온천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선물은 주지 않는다고 강제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자연 용출이 아닌 수백미터 깊이까지 구멍을 뚫어 온천수를 구하는 것은 선물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음봉에서 문장대 묘봉과 토끼봉으로 이어지는 속리산 능선을 병풍처럼 두른 운흥리의 경관은 지금도 너무나 아름답다. 이 경관을 보존해 관광자원화 하는 것과 온천을 개발한다고 이 경관에 삽을 대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속리산의 아픈 과거가 이미 말하고 있다.
속리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이전에 법주사 앞은 물론이고 위로 문장대까지 주막을 비롯한 간이 음식점들이 늘어선 적이 있었다. 그 시설들을 철거하고 자연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은 20여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속리산은 속리산일 때 가장 아름답다. 상주 속리산은 온갖 시설들이 늘어선 보은 속리산과 달리 개발의 피해를 덜 입은 터에 자연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우리 상주” “우리 괴산”을 부추기는 목소리가 속리산 초록빛 열두폭 치마 속을 헤집는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35-속리산-열두폭-치마를-벗기지-말라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호우경보가 내린 날 여인을 만났다. 초록빛 열두폭 치마를 넓게 펼치고 익어가는 들 위에 좌정한 속리산은 옛 사람들의 맑은 눈을 빌리지 않더라도 ‘치마를 맵시있게 잘 차려 입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무섭게 내리는 빗줄기도 속리산 치마폭에 안기면 물레에서 뽑아져 나오는 명주실이 되어 골을 흐르고 계곡을 채운다. 내린 비로 오랜만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산 아래로 내달리는 계곡은 비단필을 풀어 놓은 것처럼 하얗게 빛이 났다. 그 명주필이 산을 내려서면 낙동강이 되고 한강이 되고 금강이 된다.
속리산은 마땅히 생명의 땅이어야 했다. 그러나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멀리한다’(山不離俗 俗離山)는 최치원의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게 속리산은 이미 오래 전에 세속의 복판으로 끌려 나왔다. 속리산을 세속으로 끌어낸 것은 전설의 가닥을 더듬고 역사의 여백을 뒤지면 조선 3대 왕인 태종에 가 닿는다.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자신의 형제까지 도륙한 끝에 용상에 앉은 이방원은 자신의 죄를 씻겠다고 법주사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속리산의 들머리인 지금의 말티고개가 열린 것은 이때라고 한다. 태종은 법주사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칼에 목이 떨어진 영혼들을 위로하는 천도불사를 올린 뒤에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고 한다. 지금의 보은이 보령이라는 옛 이름을 버리게 된 것도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각오로 태종이 내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린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의 본을 따듯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도 속리산을 찾는다. 이때 말티고개는 세조의 행차를 위해 전석으로 포장까지 하는 호사를 누렸다. 지금도 굽이가 심하고 경사가 심한데 아무리 잘 다듬었다고 해도 고개는 험해서 세조의 가마를 멘 가마꾼들이 고개 중간에서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세조는 말을 타고 고개를 넘을 수밖에 없었다. 세조가 말을 타고 넘은 고개라 해서 말티라고 부른다는 것이 고개의 내력이었다.
세조가 병든 몸을 사리지 않고 속리산을 찾은 연유는 단지 치료를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속리산에 전하는 전설 가운데 유독 세조와 관련된 전설이 많은데 전설 속의 세조는 자연까지 복종케 하는 절대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마가 걸린다”는 왕의 말 한마디에 소나무가 가지를 쳐들고, 발목을 잡는 칡넝쿨을 “고얀 놈”이라는 한마디로 나무를 타고 오르게 만들었다는 세조의 이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조카를 죽인 패륜을 하늘의 힘을 빌려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때의 이적으로 정이품이라는 벼슬을 얻은 소나무는 지금은 한쪽 팔을 잃은 불구의 모습으로 서 있다. 혹독한 솔잎흑파리의 공격도 이겨냈지만 93년 태풍이 기어코 한쪽 가지를 부러뜨려놓은 탓이다.
정이품송에는 세조의 이야기뿐 아니라 세조에게 왕위찬탈의 부당함을 직언했다가 쫓겨난 딸 이야기도 전한다. 딸은 쫓겨난 뒤 민간에 숨어 살다가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신랑이 세조의 정적이었던 김종서의 둘째 손자였다고 한다. 둘은 속리산 인근에서 아들 딸을 한명씩 낳고 숨어 살다가 그만 세조의 속리산 행차 때 발각되게 된다. 이때 이들을 잡기 위해 군사들이 진을 친 곳이 지금의 정이품송이 서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진터라는 이름도 군사들이 진을 친 곳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속리산 제1경인 문장대(文藏臺)에 남겨진 세조의 전설은 속리산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아이러니다. 세조가 법주사 언저리에서 요양하며 목욕소라는 지명을 낳고 복천암이라는 암자를 지으며 ‘열섬의 환약과 열두동이의 탕약’으로도 낳지 않는 괴질을 달래고 있을 때 꿈 속에서 월광태자라는 귀인을 만나게 된다. 귀인이 알려주는 대로 오른 곳이 문장대이고 거기에 오르니 삼강오륜을 설파한 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조는 감읍해 기도를 올리고 신하들과 그 책의 내용을 강론했다고 한다.
월광태자라는 귀인이 삼강오륜을 세조에게 전한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조카를 죽인 악인에게 삼강오륜을 가르칠 자격을 주려 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조보다 100년 쯤 뒤 문장대에 올랐던 시인 임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행동을 했을까? 문장대는 관리들과 술타령을 벌인 보은 현감을 혼내준 임제의 이야기로 답답하기만 한 가슴을 위로해준다. 임제는 가짜수염까지 달아 신선으로 위장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 보은 현감을 실컷 나무란 뒤 신선주와 환약을 먹이는 아량까지 베푼다. 물론 신선주는 말오줌이었고 환약은 토끼똥이었다. 만약 임제가 세조와 같은 대의 사람이었다면 호랑이쯤으로 변신해 삼강오륜을 말하는 뻔뻔함을 물어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조에 얽힌 설화는 500년이 넘는 세월의 강을 끈질기게 흘러 새로운 우환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문장대 아래 바위틈에는 감로수라는 샘이 있다. 바위를 뚫고 솟는 석간수가 아니라 문장대 바위에 맺혔던 빗물이 바위벽을 타고 흘러내려 고인 물에 지나지 않는 샘이지만 묘한 위치 때문에 감로수로 불리는 샘이다. 세조가 이 샘물의 효험으로 괴질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통에 지금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출입금지’ 팻말을 넘는 외줄타기의 피해는 한 사람에 그치는 것으로 눈감을 수도 있겠지만, 문장대에서 바라보이는 상주 땅 용화온천지구의 파헤쳐진 초록은 콩 한쪽도 나눠 먹는 시골인심을 작살내고 한강의 수질까지 위협하고 있다.
세종실록에도 등장하는 용화온천은 상주에서는 세조의 괴질을 고친 명수로 불리지만 괴산에서는 불소덩어리의 맹물로 폄하된다. 온천이 개발되면 하류지역인 괴산은 환경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용화온천 개발계획은 국립공원구역 지역과 국립공원구역 외 지역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지만 두 지구 모두 개발이 중단된 채로 버려져 있다. 몸싸움으로 시작된 분쟁은 충북과 경북의 지역대립 구도로 발전하면서 법정공방으로 이어졌다. 용화지구와 문장대지구로 갈라져 진행된 재판은 공원구역 내에 있는 용화온천은 괴산쪽이 고법까지 승소했고, 공원 밖인 문장대 온천은 상주쪽이 고법까지 이겨 공사를 재개하게 됐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같은 온천지구이면서도 결과가 이렇게 다른 것은 두 구역이 선택한 정화처리시설이 다르고 국립공원 구역과 바깥으로 나뉜 탓에 적용법규가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소문은 별의별 흉흉한 억측을 만들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내걸린 현수막에 적힌 ‘상주의 자존심’ 따위의 글귀는 갈라진 인심을 봉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정부기관들의 이름도 버젓이 적혀 있었다. 지역감정을 부추기기는 괴산쪽도 마찬가지였다.
운흥리에서 멀지 않은 화양구곡의 화양동은 송이철을 맞아 동리가 온통 떠들썩하다. 마을이 공동으로 송이채취권을 입찰받고 온 마을사람들이 함께 송이를 따고 그 수익금도 공동으로 나눈다고 했다. “집집마다 한명씩 다 참여해요. 노인들은 힘이 없으니까, 혹시 있을지 모를 송이도둑을 지키는 일을 하기도 하고 품질별로 급수를 나누는 등 가벼운 일을 해요.” 젊은 사람들에게는 손해일 텐데도 공동수확 공동분배를 반대하는 이들은 없다고 한다. 호우경보에도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이들에게 산을 지키던 노인들이 따뜻한 봉지커피 한잔을 건넨다. 이런 모습이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다.
온천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선물은 주지 않는다고 강제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자연 용출이 아닌 수백미터 깊이까지 구멍을 뚫어 온천수를 구하는 것은 선물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음봉에서 문장대 묘봉과 토끼봉으로 이어지는 속리산 능선을 병풍처럼 두른 운흥리의 경관은 지금도 너무나 아름답다. 이 경관을 보존해 관광자원화 하는 것과 온천을 개발한다고 이 경관에 삽을 대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속리산의 아픈 과거가 이미 말하고 있다.
속리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이전에 법주사 앞은 물론이고 위로 문장대까지 주막을 비롯한 간이 음식점들이 늘어선 적이 있었다. 그 시설들을 철거하고 자연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은 20여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속리산은 속리산일 때 가장 아름답다. 상주 속리산은 온갖 시설들이 늘어선 보은 속리산과 달리 개발의 피해를 덜 입은 터에 자연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우리 상주” “우리 괴산”을 부추기는 목소리가 속리산 초록빛 열두폭 치마 속을 헤집는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35-속리산-열두폭-치마를-벗기지-말라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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