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사람들 32 희양산- 중놈처럼 살지 말고 스님처럼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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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03,243회 작성일 18-08-27 12:25본문
어둠이 내리는 봉암사에서는 경 읽는 소리도 목탁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라 헌강왕 5년(879년)에 창건한 절집이라고는 하지만 보이는 것은 고색창연함과 거리가 멀었다. 코를 대면 싸한 나무냄새가 금방이라도 전해질 것 같은 가람들은 새로 지은 절집에서 으레 느껴지는 호화스러움이 배어 나지 않는다. 툇마루가 놓인 가람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곱게 드리운 대나무 발이 정갈하다. 방들이 많은 것은 창건 이래 오늘에 이르도록 1천년이 넘는 긴 세월, 수많은 곡절에도 선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지켜왔다는 증거다. 봉암사는 신라 말 구산선문의 일파인 희양산파의 종찰이었다.
“스님 바깥에서 들은 절 인심이 고약합니다.” 느닷없는 질문에도 스님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다. “희양산에 잘못 올랐다가는 중들에게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란 것이 괴산에서 들은 소문이다. 인근 산꾼들치고 봉암사 스님들과 산중에서 마주친 일화를 간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입산 통제가 지독하다고 들었다. 봉암사 길목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희양산은 조계종 특별수련원인 봉암사 경내지임으로 등산객 출입을 금함’이라는 팻말에서도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한 터였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스님들이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곳에서 입산을 막으니 등산객들이 산 너머 괴산 은티에서 올라옵니다. 그 발길이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지요. 몸싸움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스님의 손이 보온병으로 향했다. 하얀 김이 해어져 구멍까지 난 장삼의 깃을 어루만지곤 천장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바람창으로 빠져나간다. 바깥 소문에 개의치 않겠다는 듯 스님의 말은 절집의 일상으로 옮겨간다.
“어제가 백중입니다. 영도천가를 위한 기도가 있는 날입니다. 하안거 기간이 끝나는 날이기도 하고요. 이제 산철이지요. 절집 정비도 하고 개인적인 용무도 보면서 좀 쉬는 그런 기간입니다.” 스님의 말에는 ‘결재 기간이었으면 당신도 산문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봉암사가 산문에 빗장을 지른 것은 지난 82년 6월. 전국 각지의 유명사찰들이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 당시 봉암사도 다른 사찰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한다. 일주문을 따라 산을 올라가는 40여리 계곡에서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음식찌꺼기로 악취가 진동하고, 심지어 마애보살좌상이 새겨진 백운대에 복날이면 개장국을 끓이는 솥이 걸리기도 했다.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난다는 마애상 밑 바위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두드렸는지 움푹 팬 상처가 지금도 남아 있다. 경내의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38호)가 보철에 의지하게 된 것도 남해에서 가져왔다는 점판암으로 된 탑비를 숫돌로 쓰려는 일부 사람들의 만행 때문이라고 한다.
산문을 닫은 지 17년, 봉암사는 중창불사를 거듭해 100여명의 대중이 참선할 수 있는 지금의 규모를 갖췄다. 그동안 희양산 일대의 자연도 제 모습을 찾았다. 여름철이면 매주 금요일과 월요일 계곡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 주요한 업무였다는 가은읍 공무원들도 이제 쓰레기를 줍기 위해 산을 오르지는 않는다. 스님들이 각목을 휘두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엄했던 산문 폐쇄의 결과였다.
봉암사 인근의 주민들은 경내를 자유롭게 드나들기를 희망한다. 빼어난 경치가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봉암사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 발길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기 때문이다. “문을 열어보십시오. 절집 경내야 지킬 수 있다고 하지만 당장 일주문 밖부터 러브호텔과 닭 잡고 소 잡는 식당들이 즐비하게 될 것입니다.” 전남 대흥사에서 왔다는 젊은 스님의 걱정이다.
그러나 봉암사의 울타리가 든든한 것만은 아니다. 봉암사 입구의 모래실계곡은 온천이 발견되면서 대단위 온천휴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이 서 있다고 한다. 완장스키장은 희양산에서 멀지 않은 대야산과 둔덕산의 비탈에 들어설 계획이다. 다행히 IMF가 닥치면서 개발 계획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백지화한 것은 아니다.
“돌 캐고 나무 베어내는 것이 당장에 먹기 좋은 곶감이지요. 개발은 길어야 5년에서 10년인데 그것을 못 봐요.” 스님의 걱정은 이미 산을 깎아 먹고 있는 원경광업소에 가 닿았다. 87년부터 시작한 원경광업소의 장석 채광은 산의 상당부분을 갉아먹고 있었다. 광업소 상공을 늘 비행하는 조종사가 직접 땅에서 보고 싶다고 일부러 찾아왔을 만큼 심각한 상태라고 하는데 광산 현장소장은 한사코 현장을 보여줄 수 없다고 버틴다. 법을 어기는 것이 없는데 왜 문제가 되냐는 것이 현장소장의 항변이었다. 그러나 도로에서 바라다 보이는 언덕의 돌무더기는 이미 흘러내리며 나무들의 숨통을 끊고 있었다.
희양산 저편 괴산군 은티마을도 석회석 광산 때문에 골병이 들어 있었다. 새마을지도자 김옥태(45)씨의 마을자랑은 광산 때문에 사라진 동굴로 번져갔다. “조 개울 건너편이 귀신굴이오. 입구는 저리 조만해도 깊이가 얼마인지 몰라. 저 산 너머까지 뚫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결딴 났지. 굴이 소문나면 광산을 못해. 그러니 그냥 덮어버리지 뭐.” 마을에서 산쪽으로 있는 장자바위라는 곳의 굴은 “희한해요. 돌이 서리처럼 내렸는가 하면 꽃처럼 활짝 폈기도 하고 돌고드름은 또 얼마나 굉장한데”라는 김씨의 말에서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관리가 안 되다 보니 종유석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였다. 종유석은 어느 집 거실의 장식품으로 팔려가거나 석회석 가루로 사라진 지 오랜인 듯했다. 장자바위의 굴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광산문을 닫으면서 입구를 막아버렸다고 한다.
20여년 동안이나 계속된 광산 피해에도 벙어리 냉가슴만 앓던 이 산골 사람들이 최근 변한 것은 올해 은티마을에 정착한 충주 연수동 성당의 연제연(54) 신부와 서울에서 3년 전에 귀농한 김석규(42)씨의 영향이 컸다.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고 위법사항을 따지는 것은 아무래도 도시 출신이 나았던 모양이었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본당신부 자리를 버리고 귀농했다는 연 신부는 배워야 한다며 인디언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국 개척기에 백인이 인디언에게 땅을 팔라고 했나봐. 인디언이 되묻더래요.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사고 파냐고. 인디언들에게 땅은 어머니고 자연은 형제자매였던 게지.” 연 신부는 산을 돈으로 보는 천박한 우리네 의식을 나무라고 있었다.
은티마을 사람들은 석회석 광산이 끝나는 2000년 4월을 기다리고 있다. 은티마을 사람들이 지난 2월 봉암사와 충주 환경운동연합과 연대해 ‘희양산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환경단체를 발족시킨 것도 석회석 광산의 소음과 진동, 분진에서 벗어나기 위한 준비였다. 괴산군에서 가장 젊은 장남식(32) 이장은 이제 그 싸움의 앞장을 서게 될 것이다. 장 이장은 자신이 광산에서 받은 피해를 대물림하지 않을 각오다. 희양산을 오르는 도시에서 온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밭이랑을 메우고,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 트렁크에 애써 키운 사과며 고추가 실려 나가는 것도 자신의 경험에서 그치기를 희망한다.
내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에도 은티마을을 지켜온 남근석 앞에서는 동고사가 열린다. 지름티, 시루봉, 오봉정 고개 등에서 산제를 드리는 제관으로 뽑히는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계곡의 얼음을 깨고 목욕재계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것은 300여년 넘도록 은티마을을 지켜준 산에 대한 은혜를 아는 까닭이다. 봄이면 온갖 나물로 상을 풍성하게 해주고 여름가뭄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모두 넉넉한 산자락이 베푸는 은혜이다. 곧 시작될 송이철도 울창한 숲만이 베푸는 자비이자 돈 구경이 어렵던 시절에는 목돈을 쥘 수 있는 기회였다.
봉암사의 스님은 닫힌 산문을 나무라지 말고 올바로 세워지는 법을 보라고 했다. 수행자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큰 포교라고 믿는 그들은 ‘금강보검’으로 ‘탐진치’ 잡념을 자르며 용맹정진한다고 했다. 경순왕이 머물렀다는 경내의 극락전과 수많은 보물들과 아름다운 희양산을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봐달라는 것이 마지막 수행처 봉암사를 지키려는 스님들의 바람이었다.
희양산 반대편 자락의 새 식구가 된 연 신부는 “중놈처럼 살지 말고 스님처럼 살라”고 한다. “봉암사를 지키는 것이 민족정신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연 신부는 심성에 법당이 있고 예배당이 있는데 종교의 차이가 무엇이 대수냐고 일갈을 던진다. 은티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자연보호 시범마을이 되기를 꿈꾼다. 이들이 있어 백두대간의 단전 희양산의 푸른 정기는 오늘도 빛난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31-희양산-중놈처럼-살지-말고-스님처럼-살아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스님 바깥에서 들은 절 인심이 고약합니다.” 느닷없는 질문에도 스님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다. “희양산에 잘못 올랐다가는 중들에게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란 것이 괴산에서 들은 소문이다. 인근 산꾼들치고 봉암사 스님들과 산중에서 마주친 일화를 간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입산 통제가 지독하다고 들었다. 봉암사 길목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희양산은 조계종 특별수련원인 봉암사 경내지임으로 등산객 출입을 금함’이라는 팻말에서도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한 터였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스님들이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곳에서 입산을 막으니 등산객들이 산 너머 괴산 은티에서 올라옵니다. 그 발길이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지요. 몸싸움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스님의 손이 보온병으로 향했다. 하얀 김이 해어져 구멍까지 난 장삼의 깃을 어루만지곤 천장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바람창으로 빠져나간다. 바깥 소문에 개의치 않겠다는 듯 스님의 말은 절집의 일상으로 옮겨간다.
“어제가 백중입니다. 영도천가를 위한 기도가 있는 날입니다. 하안거 기간이 끝나는 날이기도 하고요. 이제 산철이지요. 절집 정비도 하고 개인적인 용무도 보면서 좀 쉬는 그런 기간입니다.” 스님의 말에는 ‘결재 기간이었으면 당신도 산문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봉암사가 산문에 빗장을 지른 것은 지난 82년 6월. 전국 각지의 유명사찰들이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 당시 봉암사도 다른 사찰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한다. 일주문을 따라 산을 올라가는 40여리 계곡에서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음식찌꺼기로 악취가 진동하고, 심지어 마애보살좌상이 새겨진 백운대에 복날이면 개장국을 끓이는 솥이 걸리기도 했다.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난다는 마애상 밑 바위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두드렸는지 움푹 팬 상처가 지금도 남아 있다. 경내의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38호)가 보철에 의지하게 된 것도 남해에서 가져왔다는 점판암으로 된 탑비를 숫돌로 쓰려는 일부 사람들의 만행 때문이라고 한다.
산문을 닫은 지 17년, 봉암사는 중창불사를 거듭해 100여명의 대중이 참선할 수 있는 지금의 규모를 갖췄다. 그동안 희양산 일대의 자연도 제 모습을 찾았다. 여름철이면 매주 금요일과 월요일 계곡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 주요한 업무였다는 가은읍 공무원들도 이제 쓰레기를 줍기 위해 산을 오르지는 않는다. 스님들이 각목을 휘두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엄했던 산문 폐쇄의 결과였다.
봉암사 인근의 주민들은 경내를 자유롭게 드나들기를 희망한다. 빼어난 경치가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봉암사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 발길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기 때문이다. “문을 열어보십시오. 절집 경내야 지킬 수 있다고 하지만 당장 일주문 밖부터 러브호텔과 닭 잡고 소 잡는 식당들이 즐비하게 될 것입니다.” 전남 대흥사에서 왔다는 젊은 스님의 걱정이다.
그러나 봉암사의 울타리가 든든한 것만은 아니다. 봉암사 입구의 모래실계곡은 온천이 발견되면서 대단위 온천휴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이 서 있다고 한다. 완장스키장은 희양산에서 멀지 않은 대야산과 둔덕산의 비탈에 들어설 계획이다. 다행히 IMF가 닥치면서 개발 계획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백지화한 것은 아니다.
“돌 캐고 나무 베어내는 것이 당장에 먹기 좋은 곶감이지요. 개발은 길어야 5년에서 10년인데 그것을 못 봐요.” 스님의 걱정은 이미 산을 깎아 먹고 있는 원경광업소에 가 닿았다. 87년부터 시작한 원경광업소의 장석 채광은 산의 상당부분을 갉아먹고 있었다. 광업소 상공을 늘 비행하는 조종사가 직접 땅에서 보고 싶다고 일부러 찾아왔을 만큼 심각한 상태라고 하는데 광산 현장소장은 한사코 현장을 보여줄 수 없다고 버틴다. 법을 어기는 것이 없는데 왜 문제가 되냐는 것이 현장소장의 항변이었다. 그러나 도로에서 바라다 보이는 언덕의 돌무더기는 이미 흘러내리며 나무들의 숨통을 끊고 있었다.
희양산 저편 괴산군 은티마을도 석회석 광산 때문에 골병이 들어 있었다. 새마을지도자 김옥태(45)씨의 마을자랑은 광산 때문에 사라진 동굴로 번져갔다. “조 개울 건너편이 귀신굴이오. 입구는 저리 조만해도 깊이가 얼마인지 몰라. 저 산 너머까지 뚫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결딴 났지. 굴이 소문나면 광산을 못해. 그러니 그냥 덮어버리지 뭐.” 마을에서 산쪽으로 있는 장자바위라는 곳의 굴은 “희한해요. 돌이 서리처럼 내렸는가 하면 꽃처럼 활짝 폈기도 하고 돌고드름은 또 얼마나 굉장한데”라는 김씨의 말에서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관리가 안 되다 보니 종유석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였다. 종유석은 어느 집 거실의 장식품으로 팔려가거나 석회석 가루로 사라진 지 오랜인 듯했다. 장자바위의 굴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광산문을 닫으면서 입구를 막아버렸다고 한다.
20여년 동안이나 계속된 광산 피해에도 벙어리 냉가슴만 앓던 이 산골 사람들이 최근 변한 것은 올해 은티마을에 정착한 충주 연수동 성당의 연제연(54) 신부와 서울에서 3년 전에 귀농한 김석규(42)씨의 영향이 컸다.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고 위법사항을 따지는 것은 아무래도 도시 출신이 나았던 모양이었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본당신부 자리를 버리고 귀농했다는 연 신부는 배워야 한다며 인디언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국 개척기에 백인이 인디언에게 땅을 팔라고 했나봐. 인디언이 되묻더래요.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사고 파냐고. 인디언들에게 땅은 어머니고 자연은 형제자매였던 게지.” 연 신부는 산을 돈으로 보는 천박한 우리네 의식을 나무라고 있었다.
은티마을 사람들은 석회석 광산이 끝나는 2000년 4월을 기다리고 있다. 은티마을 사람들이 지난 2월 봉암사와 충주 환경운동연합과 연대해 ‘희양산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환경단체를 발족시킨 것도 석회석 광산의 소음과 진동, 분진에서 벗어나기 위한 준비였다. 괴산군에서 가장 젊은 장남식(32) 이장은 이제 그 싸움의 앞장을 서게 될 것이다. 장 이장은 자신이 광산에서 받은 피해를 대물림하지 않을 각오다. 희양산을 오르는 도시에서 온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밭이랑을 메우고,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 트렁크에 애써 키운 사과며 고추가 실려 나가는 것도 자신의 경험에서 그치기를 희망한다.
내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에도 은티마을을 지켜온 남근석 앞에서는 동고사가 열린다. 지름티, 시루봉, 오봉정 고개 등에서 산제를 드리는 제관으로 뽑히는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계곡의 얼음을 깨고 목욕재계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것은 300여년 넘도록 은티마을을 지켜준 산에 대한 은혜를 아는 까닭이다. 봄이면 온갖 나물로 상을 풍성하게 해주고 여름가뭄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모두 넉넉한 산자락이 베푸는 은혜이다. 곧 시작될 송이철도 울창한 숲만이 베푸는 자비이자 돈 구경이 어렵던 시절에는 목돈을 쥘 수 있는 기회였다.
봉암사의 스님은 닫힌 산문을 나무라지 말고 올바로 세워지는 법을 보라고 했다. 수행자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큰 포교라고 믿는 그들은 ‘금강보검’으로 ‘탐진치’ 잡념을 자르며 용맹정진한다고 했다. 경순왕이 머물렀다는 경내의 극락전과 수많은 보물들과 아름다운 희양산을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봐달라는 것이 마지막 수행처 봉암사를 지키려는 스님들의 바람이었다.
희양산 반대편 자락의 새 식구가 된 연 신부는 “중놈처럼 살지 말고 스님처럼 살라”고 한다. “봉암사를 지키는 것이 민족정신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연 신부는 심성에 법당이 있고 예배당이 있는데 종교의 차이가 무엇이 대수냐고 일갈을 던진다. 은티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자연보호 시범마을이 되기를 꿈꾼다. 이들이 있어 백두대간의 단전 희양산의 푸른 정기는 오늘도 빛난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31-희양산-중놈처럼-살지-말고-스님처럼-살아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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