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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사람들 19 덕항산- 이상향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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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36,244회 작성일 18-08-2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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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항산은 거대한 벽이었다. 수 백길 뼝대로 울타리를 쳐놓고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덕항산은 정수리를 구름 속에 숨겨놓기까지 했다. 백두대간이 남쪽으로의 긴 여정을 끝내고 남서쪽으로 몸짓을 트는 곳. 11대째 고향 대이리를 지켜오는 이종옥(79) 할아버지는 첫마디에 악산이라고 트집을 잡는다. “저 산이 백두산에서 시작한 낭맥이 닿은 곳인데 악산이에요. 명산은 좀더 내려가야 돼요. 태백산이 명산이지.” 이름 석자나 겨우 익혔다고 뒤로 물러앉으며 덕항산을 깎아내리지만 백두대간 중요 봉우리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덕항산을 깍아내리는 것으로 길지를 보호하려는 것만 같았다.

300년은 족히 넘었다는 이 할아버지의 너와집 사랑방으로 안겨오는 덕항산의 풍광은 눈부셨다. 내려앉은 구름이 띠를 두른 촛대봉이 중심을 잡고 덕항산 뼝대가 병풍을 쳤다. 가파른 능선에는 바늘 끝조차 들이밀지 못할 정도로 초록이 빽빽하다. 저기 어디에 동양 최대라는 엄청난 규모의 환선굴이 숨어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대이계곡을 따라 새로 낸 아스팔트 포장도로까지도 협곡의 아름다움에 묻혀버린다.

한 뼘의 밭도 들어설 수 없을 것 같은 험난하면서도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대이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하가 임금을 내치더니 새 임금 인조는 끝내 오랑캐 청나라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피 냄새가 가시지 않는 땅은 더이상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주 이씨 일파가 경기도 포천 고향을 등진 것이 그때였다. 비결이 전하는 ‘경주이선생가장결’이란 <정감록>에는 전쟁도 전염병도 흉년도 범접하지 않는 길지를 ‘귀네미’ 너머에서 찾으라고 적혀 있었다고 했다.

“덕항산을 넘어야 귀네미에요. 전에는 그곳에 감자를 심어 먹었는데….” 이연옥(65) 할머니는 환선굴이 열리면서 “사는 게 도시사람 부럽지 않다”며 옛일을 담담히 털어낸다. 산 너머에 광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민들이 귀네미에 정착하기 전까지 귀네미는 대이리 사람들의 땅이었다. 대이리에는 감자농사가 잘 안 돼 대이리 사람들은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네발로 기어 귀네미로 가야 했다. 대이리 협곡까지 화전을 일궈 옥수수를 심어야 했던 고달팠던 시절의 이야기다. “애고, 봄이면 탄광쟁이 따로 없었지. 부부가 온통 재를 뒤집어써 검정 투성이였으니까.” 서 있기조차 힘든 비탈까지 일궈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대이리 사람들은 비탈이 심하지 않은 고원인 귀네미로 터전을 옮기지 않았다. 대이리는 약속된 땅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결을 헛소리라고 일축하던 이 할아버지의 시선은 끝없이 이어지는 환선굴 관광객들에게 멎어 있었다. “한구(韓口)가 항구(港口) 된다더니….” 할아버지는 예언이 맞는다며 헛헛한 웃음을 날린다. 그런 예언을 남긴 것은 5대조로 거슬러올라간 옛 시절을 살던 도인이었다고 한다.

한구는 큰 굴로 불리던 환선굴에서 비롯된 대이리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하루에 적게는 5천여명, 많게는 1만명 넘는 사람들이 드나들게 됐으니 항구가 된 거나 다를 바 없다는 거다. 할아버지가 닫아버린 또다른 예언을 설명해준 이는 대이리 벼락방아와 굴피집의 안주인인 김필여(50)씨였다. “오십천에 쇠말이 울면 모래가 황금이 되고, 한구가 항구가 된다는 말이 있었어요.” 예언을 남긴 이는 김씨의 5대조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오십천의 철마는 영동선 철도고, 철도가 놓인 뒤 오십천 모래는 물론이고 산의 석회암까지도 돌가루로 팔려 나가고 있으니 참 신기하죠?”

대이리 땅은 어머니의 품보다 더 푸근한 여인의 자궁을 닮았다고 한다. 남성 생식기를 닮은 촛대봉까지 갖추었으니 영락없는 여인의 자궁이라는 것이다. 덕항산 환선굴을 백두대간의 항문으로 보기도 한다. 97년 개방한 환선굴에 관광객이 넘치며 엄청난 입장수입을 올려주는 것을 항문에서 누런 황금이 쏟아지는 것으로 본다.

동양 최대의 석회동굴인 환선굴을 사람들의 발길이 찾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옛날에는 동굴 구경이 큰일이었요. 소쿠뎅이(관솔) 가지를 하나 가득 져야만 굴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것이 다 탈 때쯤이야 굴 구경을 얼추 마칠 수 있었죠.” 그때는 부정한 사람이 들어가면 바람이 세져 관솔불이 꺼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관솔불로는 걷을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은 경외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전등이 보기 좋게 동굴을 밝히기 시작한 뒤 부정한 사람에 대한 제재는 사라졌다. 경외심은 수 억년에 걸쳐 생성된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의 물결이 바꾸어놓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산골 농사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았던 소는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다. 밀려드는 자동차 때문에 소를 풀어 먹이지 못하게 된 탓이다. 게다가 자동차들이 오가며 날리는 먼지에 농사도 예전만 못하니 굳이 소가 필요하지 않다. 길가 집들은 민박이며 식당이란 간판을 내걸었고 여의치 않은 집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노점을 펼쳤다. 더덕이며 옥수수엿을 판매해 얻는 수입으로 생계를 꾸린다고 했다. 산 능선 비탈밭에 씨를 뿌렸다가 걷어 들이는 더덕은 산더덕과 구별이 안 갈 정도로 맛이 좋아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가난한 산골 살림에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고아내던 옥수수엿도 졸지에 관광상품 반열에 올랐다.

대이리 사람들에게 당장의 고민은 주업인 장뇌삼을 보호하는 일이다. 관광객들이 신기하다고 만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장뇌삼을 캐들고 “심봤다”를 외치는 웃지 못할 코미디도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대이리는 400여년 마을 역사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변화를 최근 2∼3년 사이 경험하고 있다. 더위를 쫓던 계곡이 환경보호를 위해 발도 못 담그게 됐다. 자연스레 오르내리던 물골 이끼계곡에 울타리가 쳐지고 송어 양식장이 폐쇄된 것도 귀한 자연환경을 보호한다는대야 참아야 할 일이다. 약초로 재배하던 작약은 돌보는 이도 없는데 하얀 꽃을 소담스럽게 피어낸다. 묵힐 수밖에 없는 밭에는 유채며 메밀을 관상용으로 심을 계획이란다. 깊디 깊은 산골 대이리는 동굴관광도시를 내건 삼척시의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종옥 할아버지는 예천에 있다는 또 하나의 길지를 입에 올렸다. “상대, 중대, 하대가 있다고 했어요. 중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길지라고 했는데….”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질지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대이리를 수 백년간 지켜왔던 덕항산 뼝대에도 등산용 철계단을 놓는 공사가 한창이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9-덕항산-이상향은-어디에-있는가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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