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사람들 1 금강산- 옥류동 파노라마와 구룡연의 비통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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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17,490회 작성일 18-08-28 12:36본문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53년 만의 금강산 길을 축하라도 해주 듯 반짝이던 육지의 불빛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순간이었다. 남쪽 바다를 지날 때 희미하게나 보이던 백두대간의 그림자마저 묻어버릴 정도로 육지 쪽은 완전한 어둠에 묻혀버렸다. 바다 위의 별처럼 떠 있던 고깃배들의 집어등도 보이지 않는다. 동해항에서부터 쫓아오던 갈매기들만이 배가 일으키는 물살에 떠올라오는 먹이를 노릴 뿐이다.
장전항 소나무는 모두 어디 갔는가
잠시 붙인 눈을 뜨게 만든 것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도선사 김영규네다. 갑판에서 사진 촬영은 불허됐습니다.” 북쪽의 ‘백두대간 사람’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옅은 물안개와 나지막이 내려앉은 구름 사이로 금강산 자락을 첫 대면할 수 있었다. 수려한 바위를 머리에 이고 주저앉은 벌거숭이 산자락은 너무나 피곤해 보였다. ‘살아서 한번이라도 보면 죽어서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겨레의 신앙이라더니….
와르르 무너지는 상상을 납득시킨 것은 이곳 장전항 인근 영진리가 고향이라는 김희관(76) 노인이었다. 김 노인은 울창한 솔밭과 정어리 풍년으로 들썩거리던 항구, 금강산 유람객들을 상대하는 요정이며 음식점들이 즐비하던 온정리 풍경을 독백하듯 들려주었다. 모든 게 반 백년이 넘게 간직해온 기억 속의 풍경이다. 햇살이 물안개 사이로 노란 금을 긋고 멀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 무렵 비탈진 산 능선까지 널려 있는 다락밭도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세관을 지나 온정리로 향하는 길,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가 밭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미인송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미인송은 백두산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같은 종자일지라도 기후조건과 토양이 다른데 금강산 소나무를 미인송이라 부르는 것은 억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주체의 향도성 김정일’이라는 글귀 아래로 신계천이 흐르고 있었다. 쪽빛이었다. 물이 너무나 맑아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설명이지만, 물 속 바위들의 빨간색으로 미루어 물에 철분이 많거나 미네랄 함유량이 높기 때문에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구룡폭포에 이르는 길은 너무 깨끗했다. 웬만한 곳은 자연석으로 포장돼 있었고 계류를 건너는 다리들은 비록 낡았지만 모양을 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길 양옆으로 곳곳에 나타나는 바위의 글씨들은 대부분 70년대 초반에 새겼다는 날짜를 주석처럼 달고 있다. 10월 유신 이후 남쪽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던 간판이나 포스터가 걸리던 시절이 있었다.
차라리 꿈이어라! 옥류동 계곡
금강산에는 금강문으로 불리는 자연 돌문이 10여개 있다고 한다. 그 문을 지나야 금강산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금강문을 지나 펼쳐지는 옥류동 계곡의 파노라마는 그때까지 품었던 ‘설악산과 비슷하네’하는 생각을 싹 지워버린다.
무대바위에서 바라보는 옥류담과 옥류폭포, 그리고 채화봉에서 천화대로 이어지는 능선의 파노라마 앞에 서면 ‘차라리 여기서 죽고 싶다’라는 말 밖에는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천화대 경치에 취해 고개를 하늘로 들고 오르며 만나는 연주담, 연주폭포, 비봉폭포, 무봉폭포의 연이은 절경에 취해 들뜬 기분으로 만난 것이 마지막 구룡폭포였다.
그늘진 구룡폭포는 하얗게 얼어가고 있었다. 유점사 늪에서 살다가 천축에서 온 53부처에 쫓겨난 9마리 용이 산다는 구룡연. 올라온 쪽을 제외하고는 세 방향 모두 천 길 벼랑으로 막혀 있었다. 이제까지의 아름답고 화려한 경치와 달리 엄숙하고 비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날리는 물방울이 하얗게 얼어붙은 쇠줄을 잡는다면 그리 위험할 것 같지 않은데 여성 안내원은 못 미더웠던가보다. “선생님, 그만 가시라요. 고기는 위험하단 말입니다.”
보고 싶었던 것은 물이 아니고 바위가 아니었다. 전설이었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산이었던 금강산에는 신선이 살고 있었다. 가난한 나무꾼을 위해 금도끼 은도끼를 내주고 바둑 훈수에 정신이 빠져 돌이 되는 것도 몰랐던 신선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었다. 9룡이 53부처에 쫓겨나면서 금강산은 ‘1만2천 보살들의 부처를 설법’하는 불국토가 아니었다. 왕실의 안녕을 빈다며 마을 피골까지 빼내는 중들과 복을 받겠다며 가난한 백성들에게 과도한 공역을 지우는 왕실의 산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금강산이 차라리 다른 지방에 있을 것이지”하는 탄식도 나왔다고 한다. 소용돌이치는 푸른 물결을 따라 맴돌아 절치부심하며 금강산을 되찾을 날을 기약하는 용의 모습은 끝내 보지 못했다.
온정령 넘어 백두대간으로 가고 싶다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온정령 고개를 그들은 영웅도로라 부른다고 했다.시멘트로 포장된 106굽이 동서쪽은 금강산의 식물상을 대표하는 곳이라 했는데 개골산은 그것들을 보여주지 못했다. 얼어붙은 도로 탓에 버스가 오르지 못하자 굽이를 가로지르는 남쪽 사람들의 발길에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에 걱정만 한아름 안을 뿐이었다. 만물상을 지키는 무사바위의 눈치를 보는 듯한 귀면암도 초라하기만 했다. 또 하나의 금강문인 하늘문을 지나 오른 천선대에서 만물상을 마주했지만 아무런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관음연봉 넘어 9룡들의 탄식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동서로 40여km, 남북으로 60여km에 이른다는 금강산. 외금강 9개의 여정 가운데 겨우 2개만을 더듬고 금강산을 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다만 북쪽 백두대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남쪽으로 내려가는 백두대간으로의 긴 여정에 힘을 얻었다고 자위할 뿐이다. 멀리 눈 덮인 비로봉이 햇빛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1998년 12월>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금강산-옥류동-파노라마와-구룡연의-비통미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장전항 소나무는 모두 어디 갔는가
잠시 붙인 눈을 뜨게 만든 것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도선사 김영규네다. 갑판에서 사진 촬영은 불허됐습니다.” 북쪽의 ‘백두대간 사람’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옅은 물안개와 나지막이 내려앉은 구름 사이로 금강산 자락을 첫 대면할 수 있었다. 수려한 바위를 머리에 이고 주저앉은 벌거숭이 산자락은 너무나 피곤해 보였다. ‘살아서 한번이라도 보면 죽어서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겨레의 신앙이라더니….
와르르 무너지는 상상을 납득시킨 것은 이곳 장전항 인근 영진리가 고향이라는 김희관(76) 노인이었다. 김 노인은 울창한 솔밭과 정어리 풍년으로 들썩거리던 항구, 금강산 유람객들을 상대하는 요정이며 음식점들이 즐비하던 온정리 풍경을 독백하듯 들려주었다. 모든 게 반 백년이 넘게 간직해온 기억 속의 풍경이다. 햇살이 물안개 사이로 노란 금을 긋고 멀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 무렵 비탈진 산 능선까지 널려 있는 다락밭도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세관을 지나 온정리로 향하는 길,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가 밭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미인송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미인송은 백두산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같은 종자일지라도 기후조건과 토양이 다른데 금강산 소나무를 미인송이라 부르는 것은 억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주체의 향도성 김정일’이라는 글귀 아래로 신계천이 흐르고 있었다. 쪽빛이었다. 물이 너무나 맑아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설명이지만, 물 속 바위들의 빨간색으로 미루어 물에 철분이 많거나 미네랄 함유량이 높기 때문에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구룡폭포에 이르는 길은 너무 깨끗했다. 웬만한 곳은 자연석으로 포장돼 있었고 계류를 건너는 다리들은 비록 낡았지만 모양을 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길 양옆으로 곳곳에 나타나는 바위의 글씨들은 대부분 70년대 초반에 새겼다는 날짜를 주석처럼 달고 있다. 10월 유신 이후 남쪽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던 간판이나 포스터가 걸리던 시절이 있었다.
차라리 꿈이어라! 옥류동 계곡
금강산에는 금강문으로 불리는 자연 돌문이 10여개 있다고 한다. 그 문을 지나야 금강산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금강문을 지나 펼쳐지는 옥류동 계곡의 파노라마는 그때까지 품었던 ‘설악산과 비슷하네’하는 생각을 싹 지워버린다.
무대바위에서 바라보는 옥류담과 옥류폭포, 그리고 채화봉에서 천화대로 이어지는 능선의 파노라마 앞에 서면 ‘차라리 여기서 죽고 싶다’라는 말 밖에는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천화대 경치에 취해 고개를 하늘로 들고 오르며 만나는 연주담, 연주폭포, 비봉폭포, 무봉폭포의 연이은 절경에 취해 들뜬 기분으로 만난 것이 마지막 구룡폭포였다.
그늘진 구룡폭포는 하얗게 얼어가고 있었다. 유점사 늪에서 살다가 천축에서 온 53부처에 쫓겨난 9마리 용이 산다는 구룡연. 올라온 쪽을 제외하고는 세 방향 모두 천 길 벼랑으로 막혀 있었다. 이제까지의 아름답고 화려한 경치와 달리 엄숙하고 비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날리는 물방울이 하얗게 얼어붙은 쇠줄을 잡는다면 그리 위험할 것 같지 않은데 여성 안내원은 못 미더웠던가보다. “선생님, 그만 가시라요. 고기는 위험하단 말입니다.”
보고 싶었던 것은 물이 아니고 바위가 아니었다. 전설이었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산이었던 금강산에는 신선이 살고 있었다. 가난한 나무꾼을 위해 금도끼 은도끼를 내주고 바둑 훈수에 정신이 빠져 돌이 되는 것도 몰랐던 신선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었다. 9룡이 53부처에 쫓겨나면서 금강산은 ‘1만2천 보살들의 부처를 설법’하는 불국토가 아니었다. 왕실의 안녕을 빈다며 마을 피골까지 빼내는 중들과 복을 받겠다며 가난한 백성들에게 과도한 공역을 지우는 왕실의 산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금강산이 차라리 다른 지방에 있을 것이지”하는 탄식도 나왔다고 한다. 소용돌이치는 푸른 물결을 따라 맴돌아 절치부심하며 금강산을 되찾을 날을 기약하는 용의 모습은 끝내 보지 못했다.
온정령 넘어 백두대간으로 가고 싶다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온정령 고개를 그들은 영웅도로라 부른다고 했다.시멘트로 포장된 106굽이 동서쪽은 금강산의 식물상을 대표하는 곳이라 했는데 개골산은 그것들을 보여주지 못했다. 얼어붙은 도로 탓에 버스가 오르지 못하자 굽이를 가로지르는 남쪽 사람들의 발길에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에 걱정만 한아름 안을 뿐이었다. 만물상을 지키는 무사바위의 눈치를 보는 듯한 귀면암도 초라하기만 했다. 또 하나의 금강문인 하늘문을 지나 오른 천선대에서 만물상을 마주했지만 아무런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관음연봉 넘어 9룡들의 탄식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동서로 40여km, 남북으로 60여km에 이른다는 금강산. 외금강 9개의 여정 가운데 겨우 2개만을 더듬고 금강산을 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다만 북쪽 백두대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남쪽으로 내려가는 백두대간으로의 긴 여정에 힘을 얻었다고 자위할 뿐이다. 멀리 눈 덮인 비로봉이 햇빛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1998년 12월>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금강산-옥류동-파노라마와-구룡연의-비통미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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